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그의 부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부산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영도다리.
영도다리가 들리기 전에 아이스께끼를 파는 저 너머의 아이스께끼 장수에게 뛰어갔다 와야 했다고.
오빠가 영도다리를 걸어서 사주는 아이스께끼는 왜 그리 맛이 있었는지. 그는 틈만 나면 영도다리와 아이스께끼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내가 여행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여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영도다리와 아이스께끼는 전쟁통 어린아이의 여유를 만끽하는 장치였는지도 모르겠다.
부산에서의 생활에는 영도다리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전쟁통에 멀쩡한 학교 건물은 모두 군용 병원으로 쓰였고, 그래도 학생들은 배워야 한다며 천막을 치고 공부를 했다고 했다. 그는 공부하는 걸 좋아한 것 같다. 천막에서 셈을 하고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그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또 그가 부산으로 이사한 뒤에 친구의 소개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는 교회생활에 아주 열심이었고 특히 교회 성가대에 아주 사명감을 가지고 다녔다고 했다. 사명감을 가진 성가대 활동은 그가 칠순이 되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모든 활동을 접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성가대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아마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이던가. 그는 성가연습을 하기 위해 교회에 가겠다고 했지만 작은 여자아이가 태풍에 잘못될까 걱정된 아버지와 오빠가 절대 안된다고 호통을 치며 말렸다고. 그래서 그는 부모와 하느님 사이에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그래도,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집안 식구들의 생계를 실질적으로 책임졌던 오빠는 건착망어업조합(정확한 이름은 한국청건착망어업조합인 것 같다)에 다녔다고 했다. 고등어배가 들어오는 날은 온 식구가 고등어로 포식하는 날이었다. 그의 올케언니는 남편이 바리바리 가지고 온 고등어로 그날 먹을 양식을 만들고 항아리에 소금을 넣어 재워두고, 일부는 살을 발라내어 고등어 동그랑땡을 만들어주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등어를 좋아했다. 그가 살림을 주도할 때 구워주는 고등어구이는 맛이 있었지만 내 살림에 그가 들어와 가끔 고등어를 사다놓으면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그는 "고등어로 동그랑땡을 만들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라고 말하긴 했지만 내 기억에 그가 고등어 동그랑땡을 해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그가 고등어를 좋아하는데, 나는 그에게 고등어구이를 해준적도 없는 것 같네......